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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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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포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 형제이자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으로, 본명은 아르히다이오스이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무희 필리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왕위에 올랐다. 지적 장애가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언에 따라 바빌론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섭정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했으며, 기원전 317년 올림피아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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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 시대에 도키모스 또는 셀레우코스 1세의 아르콘 휘하에서 바빌론 조폐국에서 발행된 금화
필리포스 3세 통치 기간 동안 바빌론에서 주조된 금 스타테르. 앞면: 아테나의 투구 쓴 머리가 오른쪽을 향하고 있음; 뒷면: 니케가 왼쪽으로 서서 화환과 스타일리스를 들고 있음.
이름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
로마자 표기Pillipposeu 3se Arhidaioseu
칭호마케도니아의 왕
출생명아리다이오스
출생기원전 357년경
사망기원전 317년 12월 25일
종교고대 그리스 종교
통치
즉위기원전 323년
퇴위기원전 317년
선임자알렉산드로스 3세
후임자알렉산드로스 4세
공동 통치자알렉산드로스 4세 (기원전 323년–317년)
가문
왕조아르게아스 왕조
아버지필리포스 2세
어머니라리사의 필린나
배우자에우리디케 3세
이집트 파라오
재위기원전 323년 – 317년
선임자알렉산드로스 3세
후임자알렉산드로스 4세
호루스 이름강한 황소, 마아트의 사랑을 받는 자
네브티 이름외국 땅의 통치자
황금 이름사랑받는 자
이름펠루푸이사 (필리포스)
페르시아 왕
재위기원전 323년 – 317년
선임자알렉산드로스 3세
후임자알렉산드로스 4세

2. 생애

카르나크의 부조에 묘사된 파라오로서의 필리포스 3세


아르히다이오스는 필리포스 2세의 후계자로서 알렉산드로스를 대신할 유력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사트라프카리아의 픽소다루스가 자신의 딸을 알렉산드로스와 결혼시키려 하자, 왕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아들 아르히다이오스를 남편으로 제안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 왕조적 결합을 막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3]

형 알렉산드로스의 통치 기간(기원전 336–323년) 동안 아르히다이오스에게 어떠한 민간 또는 군사적 지휘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2. 1. 아리다이오스의 등장

필리포스 2세라리사 출신의 무희 필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다이오스는 서자였다. 하지만 그의 결혼 문제를 놓고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사이가 험악해져, 알렉산드로스가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떠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아리다이오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올라가 알렉산드로스의 경쟁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올림피아스는 아리다이오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한다. 아리다이오스는 이 독으로 인해 지적 장애를 갖게 되어, 사실상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다.[3]

이후 아리다이오스는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오랫동안 그림자 같은 존재로 지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에 동생 알렉산드로스가 갑작스럽게 죽자 상황이 급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대제국을 이룩했지만,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그의 유언은 "가장 강한 자가 내 뒤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어서, 여러 장군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그의 신하들은 바빌론에서 앞으로의 체제를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당시 혈통상 알렉산드로스와 가장 가까운 후계자로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궁 바르시네가 낳은 헤라클레스가 있었지만, 어린데다 서출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무장 네아르코스가 그를 추천했지만,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왕비 록사네는 당시 임신 6개월이었지만, 태어날 아이의 성별도 모르는 상태에서 후계자로 삼을 수는 없었다. 장군 페르디카스는 일단 그녀가 출산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자고 제안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방인의 혈통을 가진 왕자의 상속을 반대하며 중신들의 합의제를 제안했다. 무장 멜레아그로스는 다른 사람들의 논쟁을 일축하고, 재빨리 군대를 장악하려 했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이때 무명의 병사가 갑자기 아리다이오스라는 이름을 외치며 그가 왕으로서 자격을 갖춘 유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여 단번에 대세는 아리다이오스에게 기울었다. 당시 바빌론에 있던 아리다이오스를 즉시 데려왔는데, 필리포스의 이름으로 환호를 받자 멜레아그로스는 즉각 아리다이오스의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후견인으로서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두려움을 느낀 페르디카스와 멜레아그로스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질 뻔했지만, 아리다이오스는 병사들에게 전투를 끝내도록 설득하여 분쟁을 훌륭하게 막았다. 그러나 며칠 후 군대를 정화하는 의식을 하던 중, 페르디카스의 손에 의해 멜레아그로스는 지지자들과 함께 제거되었다.

이처럼 페르디카스가 일단 주도권을 잡고 무장들에게 각각의 관할 지역을 지정하여 제국을 분할했다. 아리다이오스는 필리포스 3세로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위에 올랐지만, 대왕의 왕비 록사네의 출산을 기다려 태어날 아이가 남자아이라면 아리다이오스와 공동 통치자가 되도록 결정되었다.

2. 2.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알렉산드로스 3세(이하 알렉산드로스 대왕)가 갑작스럽게 죽은 뒤, 후계자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신하들은 바빌론에서 향후 체제를 결정하는 회의(바빌론 회의)를 열었다.[4] 혈통상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가장 가까운 후계자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궁 바르시네가 낳은 헤라클레스가 있었지만, 어리고 서출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비 록사네는 당시 임신 6개월이었지만,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없어 후계자로 삼을 수 없었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이때 무명의 병사가 아리다이오스의 이름을 외치며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유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여 단번에 대세는 아리다이오스에게 기울었다. 당시 바빌론에 있던 아리다이오스는 즉시 불려왔고, 필리포스의 이름으로 환호를 받자 멜레아그로스는 즉각 아리다이오스의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후견인으로서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를 원했다.[5]

페르디카스와 멜레아그로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질 뻔했지만, 아리다이오스는 병사들에게 전투를 끝내도록 설득하여 분쟁을 막았다. 그러나 며칠 후 군대를 정화하는 의식 중에 페르디카스에 의해 멜레아그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제거되었다.

페르디카스가 주도권을 잡고 제국을 분할했다. 아리다이오스는 필리포스 3세로 즉위했지만, 록사네의 출산을 기다려 태어날 아이가 남자 아이라면 공동 통치자가 되도록 결정되었다. 록사네가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낳자, 알렉산드로스는 삼촌 필리포스 3세와 함께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공동으로 올랐다. 필리포스 3세가 통치하되,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새로운 섭정인 페르디카스의 권한으로 결정되었다.

2. 3. 필리포스 3세 즉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할 당시 바빌론에 있었던 아르히다이오스는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으나, 정신적 장애로 인해 통치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4] 기병대 지휘관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임신한 아내 록사네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팔랑크스를 지휘하는 멜레아게르는 아르히다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결국 아르히다이오스는 필리포스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고, 록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공동 통치자가 되도록 타협이 이루어졌다.[5] 록사네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알렉산드로스 4세는 삼촌 필리포스 3세와 함께 마케도니아의 공동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새로운 섭정인 페르디카스가 행사했다.

필리포스 3세의 즉위 소식이 마케도니아에 전해지자, 필리포스 2세의 딸 키나네는 자신의 딸 에우리디케를 필리포스 3세와 결혼시키기 위해 아시아로 향했다. 이는 섭정 페르디카스에게는 명백한 모욕이었고, 페르디카스는 동생 알케타스를 보내 키나네를 살해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군대가 반발하자, 페르디카스는 결국 결혼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필리포스 3세는 야심 차고 결단력 있는 아내 에우리디케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2. 4. 디아도코이 전쟁과 권력 투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이복형제인 아르히다이오스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으나 정신적 장애로 인해 통치에 부적합했다.[4] 기병대 지휘관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임신한 아내 록사네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팔랑크스를 지휘하는 멜레아게르는 아르히다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4] 결국 아르히다이오스가 필리포스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르고, 록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공동 통치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5] 록사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는 삼촌인 필리포스 3세와 함께 공동으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은 섭정인 페르디카스가 행사했다.

필리포스 3세 아르히다이오스의 동전. 페르디카스 치하 기원전 323–320년경 바빌론에서 주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언을 둘러싼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고, 필리포스 3세는 여러 권력자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페르디카스가 제국 섭정으로서 알렉산드로스 4세를 보좌하고, 크라테로스가 필리포스 3세의 후견인이 되었으나, 기원전 321년 크라테로스는 헬레스폰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필리포스 3세는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옮겨졌으나, 카산드로스폴리페르콘이 제국 섭정 지위를 놓고 경쟁했다. 필리포스 3세의 아내 에우리디케 2세카산드로스와 연대하여 마케도니아 왕가의 실권을 잡으려 했다. 기원전 321년 시리아의 트리파라디수스 조약에서 안티파테르가 새로운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필리포스 3세 부부는 안티파테르를 따라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섭정 안티파테르는 이듬해 자연사했고, 그의 친구 폴리페르콘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안티파테르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이를 거부하고 디아도코이의 두 번째 전쟁을 일으켰다. 에우리디케 2세는 다시 한번 남편을 섭정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할 기회를 얻었다. 기원전 317년, 카산드로스가 폴리페르콘을 마케도니아에서 몰아내자 에우리디케 2세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고 남편을 설득하여 그를 새로운 섭정으로 지명하게 했다.

이에 폴리페르콘과 연대했던 올림피아스는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마케도니아를 장악했고, 기원전 317년 필리포스 3세는 올림피아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2. 5. 에우리디케 2세와의 결혼과 권력 장악 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언을 둘러싼 무장들의 다툼(디아도코이 전쟁)이 가라앉지 않았고, 기원전 321년 헬레스폰토스 전투에서 크라테로스가 사망했다. 이후 필리포스 3세는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는 카산드로스폴리페르콘이 제국 섭정의 지위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필리포스 3세의 아내 에우리디케 2세는 이때 카산드로스와 연대하여 마케도니아 왕가의 실권을 잡으려 했다.

기원전 317년 카산드로스가 폴리페르콘을 마케도니아에서 몰아냈을 때, 에우리디케 2세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고 남편을 설득하여 그를 새로운 섭정으로 지명하도록 했다. 카산드로스는 헬레니즘 그리스 원정을 떠나면서 에우리디케 2세에게 마케도니아 통제권을 위임했다.

이에 폴리페르콘과 연대했던 올림피아스는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 결국 필리포스 3세는 기원전 317년 올림피아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2. 6. 최후

기원전 317년, 필리포스 3세는 올림피아스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 2세는 자결을 강요받았다.[6]

3. 무덤

1977년 베르기나 근처에서 중요한 발굴이 이루어져 남성 골격이 있는 두 기의 왕실 고분이 발견되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이 유해가 필리포스 2세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필리포스 아리디이오스의 유적이라고 제안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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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그리스 북부 베르기나 인근에서 세 개의 마케도니아 무덤이 추가로 발견되었다.[8] 2호 무덤은 2개의 방으로 구성된 왕족 무덤으로, 은제 용기, 청동 무기 및 목욕 장비, 금과 상아 방패 등 부장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바깥쪽 방에는 20대 여성의 유골이 담긴 금 상자가, 안쪽 방에는 금관과 40대 남성의 유골이 담긴 금 상자가 있었다.[9]

현장 책임 고고학자인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교수는 다른 여러 고고학자들과 함께 2호 무덤에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마지막 부인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 근거는 무덤의 풍부한 장식, 유골의 연령, 남성 유골의 오른쪽 눈구멍 손상, 그리고 외상을 입은 대퇴골 때문이었다.[9][10] 그러나 오른쪽 눈구멍이 거의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손상을 특정할 수 없었고, 부상 부위도 잘못된 다리였다.[9] 무덤에서 발견된 아테네 도자기는 기원전 4세기 마지막 분기에서 기원전 3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6년에 사망했다. 리키아 무덤과 유사한 아치형 지붕에 대한 건축학적 증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침공 이후의 시점을 가리킨다.[9]

2015년 법의학 연구 결과, 필리포스 2세는 1호 무덤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10]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2호 무덤에 필리포스 3세와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그들의 사망 시기가 기원전 317년이었고 아리다이오스가 매장 시 예우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9]

정강이 보호대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필리포스 2세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에우리디케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것일 수도 있다.[10] 에우리디케가 여러 전투에서 싸운 전사였으며 정강이 보호대가 필요했을 수 있다.[11] 아리다이오스가 기원전 323년 왕위에 오를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의복을 입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갑옷 일부가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2호 무덤에서 발견된 손으로 두드려 만든 철제 헬멧은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멧과 일치한다.[10]

4. 대중문화 속의 아리다이오스

메리 르노의 소설 ''장례 게임''에서 아리다이오스는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르노의 소설에서 악당 카산더는 올림피아스가 아리다이오스와 에우리디케를 죽일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마케도니아로의 진격을 늦춘다.[1]

아나벨 리옹의 소설 ''황금비율''에서도 아리다이오스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어린 아리다이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도를 받으며, 훗날 알렉산더 대왕이 되는 동생을 가르친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형의 열등한 지성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세상을 정복하러 떠나기 전에 그를 사랑하게 된다.[2]

일본 만화 ''Historie''에서 아리다이오스는 지적 장애가 있는 어린아이로 묘사된다. 에우메네스가 그에게 장난감 전차를 만들어 주자 행복해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장난감을 파괴하자 슬퍼한다. 에우메네스는 나중에 장난감을 새것으로 바꿔 주고 전차를 묻으라고 말한다.[3]

아리다이오스는 인도 역사 드라마 시리즈 ''포러스''에도 등장한다.[4]

에릭 플린트의 소설 ''알렉산더의 유산''과 그 속편 ''마케도니아의 위험''에서 필립은 중요한 인물이다. 필립은 에우리디케와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녀에게 만져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알렉산더 사후 몇 달 후, 시간 여행자들의 유람선이 나타나 역사를 바꾸고, 필립과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막지만, 그들은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무스에게 포로로 잡혀 시간을 보낸다. 그는 스펙트럼 장애를 겪고 있지만, 사진 기억력과 암산 능력이 뛰어나다. 그의 상태는 시간 여행자 중 한 치료사의 치료와 의료용 마리화나 및 기타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개선되었고, 두 번째 책에서 에우리디케와 아이를 갖는다.[5]

참조

[1] 서적 Olympias: mother of Alexander the Great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1-06-14
[2]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8.2.1-4
[3] 서적 'Alex.'
[4] 문서 2014
[5] 서적 Alexander's Heirs: The Age of the Successor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4-07-14
[6] 서적 A History of Macedonia: 336–167 B.C. https://books.google[...] Clarendon Press 1988
[7] 서적 Verghina Hellenic Minister of Culture, Athens
[8] 웹사이트 The Royal Macedonian Tombs at Vergina https://www.worldhis[...] 2022-01-06
[9] 서적 Greek Art and Archaeology c. 2500-c.150 BCE Second Edition Thames & Hudson
[10] 웹사이트 Was This Really the Tomb of Alexander the Great's Father? https://web.archive.[...] 2015-07-21
[11] 논문 The lameness of King Philip II and Royal Tomb I at Vergina, Macedonia 2015-07-16
[12] 서적 Verghina Hellenic Minister of Culture, Ath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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